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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2편) 일본은 메이지 유신을 어떻게 성공하였나?


2편) 일본은 메이지 을2편) 일본은메이지 유신을 어떻게 성공하였나? 어떻게 성공하였나?

2편) 일본은 메이지 유신을 어떻게 성공하였나?

출처 : http://www.ygosu.com/community/yeobgi/1351509



1편에서 말했듯이.


메이지유신은 하루아침에 뚝딱 만들어진 결과물이 아니며,


에도시대 수백년 동안 경제, 사회, 정치 모든 분야에서 변화의 싹이 트고있었기 때문이야.


 


2편. 경제의 발전


1편에서 하도 나보고 뉴라이트니 일뽕이니 해서 (별로 그렇게 쓰지도 않았는데)


국뽕에 너무 취하신 불편한 분들이 계실까봐


EBS 공인방송 짤로 밑밥을 좀 깔고 갈게.





혹시 모르는 사람도 있을테니


에도 = 지금의 도쿄


 


 


 



신유한 : 조선통신사를 다녀온 인물로 일본에서 보고 듣은 견문록 "해유록"이란 책을 씀


임진왜란 이전부터 조선은 일본에게 군사력도, 경제력도 모두 추월당한지 오래였어.


자 이제, 밑밥좀 깔아놨으니 시작할께.


 


 



사실 일본은 전국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때 부터 경제력, 군사력 모두 조선을 앞질렀어.


그리고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에도시대는 평화의 시대를 거치며 더욱 부강해졌어.


 


 


조선과 달리 일본은 일찍이 은(銀)을 주로한 다양한 화폐를 사용하고 있었고,


상업활동을 막부들이 스스로 나서서 돈을 벌 궁리를 할 정도로 경제활동에 거리낌이 없었어.


 


 


 


 

에도막부는 중구난방으로 쓰이던 여러 화폐를


금, 은, 동 세가지로 통일시키는 삼화제도를 시행해.


화폐의 중요성.... 말안해도 되겟지??


 


 


 


에도시대의 극장.


상업과 유통의 발달로 백성들의 생활 수준이 올라가니 다양한 여가활동이 대중화 되기 시작했어.


서점도 성행해서 거의 모든 일본의 백성들은 원하면 언제든지 책을 구입해서 읽을 수 있었지.




 




일화로 유성룡이 임진왜란을 겪고나서 뼈아픈 반성을 담은 징비록.


조선 조정에서는 너무 자세한 군사기밀들도 적혀있어 금서로 지정했지만


일본 저잣거리 서점에서는 이미 목판 인쇄되어 팔리고 있었다는......


 


 


 

미쓰코시 백화점의 전신인 미쓰이 포목점이야.


당시 파격적인 제도인 가격 정찰제와 현금거래로 많은 점포를 늘리는데 성공했어.


화폐와 상업, 유통 발달로 인해 작지만 자본주의의 초기모습이 나타나기도 했지.


 


  


 


17C ~18C 에도의 인구는 100만명 이라고는 하는데 과장된 수치라고 생각해. 


(당시 인구를 정확히 알 수 있다면 정말 좋겟지만...)


동시대 런던과 파리의 인구가 40만명 정도라고 하는데. 베이징은 50~60만 조선은 20~30만.


그만큼 에도가 큰 도시임에는 틀림없어.


 


 

에도시대 경제호황의 한 몫을 한것이 바로 참근교대(参勤交代) 라는 것이야.


도쿠가와 가(家)는 번(영주) 들의 반란을 막고자, 1년마다 각 번의 다이묘들을 에도로 불러들였어.


에도에 머무는 기간을 다 채우고 다시 자신의 영지로 돌아가는 다이묘들은 


자신의 정실부인과 대를 이을 자식들을 에도에 볼모로 남겨두고 가야만 했어.


신라의 참수리제도, 고려의 기인제도와 비슷하지만 클라스가 달랐지.


 


 


 


 


당시 에도시대에는 총 260개의 번, 즉 260명의 크고 작은 다이묘가 있었어.


매년마다 자신의 가솔들을 모두 대리고 에도로 가야하는 다이묘들의 고충은 이만 저만이 아니였어.


그들이 각 지방에서 에도까지 가는 모든 경비와 


자신의 가솔들이 에도에서 살아야 할 저택도 다 자비로 해결해야 했기 때문이야.


 


 


 

가장 맨 밑의 규슈지방의 사쓰마번 참근교대 내역을 보면,


440리 (1700km)를 40~60일 동안 1880명의 가솔들이 17000냥의 경비를 쓴것을 알 수 있어.


엄청나지... 이 짓거리를 에도시대 내내 1년마다 전국적으로 260명의 다이묘들이 참근교대를 햇으니;;;


 


 


 


 

수십일 동안 먹고 자고 하는 모든 경비를 본인이 부담해야 했으니


다이묘들에게 엄청난 재정의 압박이 되었고, 


처자식이 에도에 붙잡혀 있으니 반란을 일으키기도 힘들었어.


 


 


 

참근제도로 다이묘들을 주기적으로 털어댄 덕분에


도쿠가와 가문은 250년이 넘는 세월동안 정권을 유지할 수 있었지.


 




 


 

그리고 결과적으로 일본의 경제와 유통에 엄청난 도움을 줬지.


먼길을 가야했기 때문에, 이들을 위한 숙박시설과 역참, 식당들이 많이 생겨났고 도로도 잘 정비될 수 밖에 없었어.


또 에도뿐만 아니라 지방의 지역경제 발전에도 이바지 했지.


 


 


에도시대의 도로


 


 


지금 남아있는 도로


 


 




(키ㅋㅋㅋㅋㅋㅋㅋ 왜놈은 왜놈이다)


이렇게 평화가 지속되면 좋을줄 알았는데... 이름없는 하층 사무라이들은 그렇지 못햇어.


사무라이란 본디 전쟁을 통해 승진을 하고 권력과 부를 가지는 존재였는데


전쟁할 일이 없으니,, 승진할 일도 없고, 항상 녹봉은 그대로인데 물가는 계속 올라가고 


갈수록 먹고 살기가 더 팍팍 해졌어.


 




사무라이들은 무사의 체통을 지키랴, 품위유지를 하랴 참근교대갈때 먹고 쓸돈은 많은데


조닌처럼 장사를 할수도 없고 농민처럼 농사를 할수도 없으니


자신의 봉급으로는 감당할 수가 없으니 상인들에게 돈을 빌리기 시작해.


 


 


 


사무라이 뿐만 아니라 영지도 작고 가난한 다이묘들도 돈이 궁해지자


돈을 빌리게 되고, 점차 사채업 상인들이 늘어가기 시작해.




 

그리자, 자신들보다 낮은 취급을 받던 조닌(상인)들이


상업을 통해 부를얻고 점점 세력이 커지자 사무라이들의 입지는 작아져만 갔어.


 


 


갈수록 하층 사무라이들과 농민들의 빈익빈 부익부가 심해졌고


토지를 몰수당하는 농민들도 생겨나고 소작인으로 전락해가.


그러거나 말거나 상인들은 자신의 배만 불려 나갔어.


 




17~18세기는 전세계적으로 소빙하기 시절, 일본도 기근을 피해갈 수 없었어.


교호 대기근, 덴메이 대기근, 덴포 대기근을 연타로 맞은 일본은


쌀값이 폭등했고, 그렇게 풍요롭던 오사카에서도 아사자가 줄을 이었어.


 


 


 

고리대의 등장, 매점매석, 연이은 기근으로 인해 재정이 부족해진 막부는


농민들에게 세금폭탄을 던져줘버려.


에도시대는 원래 살인적인 세금으로 유명한데


세금을 더 올려버리니 농민들은 더이상 먹고 살 수 가 없었어.


 


 


 

결국 참다못한 농민들과 막부의 전직 하급 관리인이 일으킨 오시오의 난은


막부의 전직 관리인이 난을 일으켰다는 점에서 막부와 다이묘들에게 큰 충격을 줘.


 


 

사무라이는 사무라이대로, 농민은 농민대로, 관리는 관리대로


결국 각 계층들의 쌓여왔던 불만이 터지면서


막번 체제의 사회가 점차 불안해지고 흔들리기 시작한 거지.




 

 

비슷한 시기. 조선도 정조가 죽고 순조 이후부터 안동김씨를 비롯한


외척가문을 등에 엎고 백성을 수탈하던 때였어.


삼정의 문란, 백골징포 유명하지?


 


 


 

조선과 일본 모두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였어.


하지만 결국 변화를 단행한건 안타깝게도 일본이였지만.




경제편 끝.


 


이편에서 말하고자 했던 내용은


일본의 경제발전이 마냥 대단하다라고 자랑하는게 아니고


급속한 경제발전 속에서 생긴 부작용이 결국 막부체제에 끼친 영향을 소개하고자 쓴글이야.


오해 없길 바래.


 


1편 학문


2편 경제


3편 체제? 정치? (예상)


 

다음 마지막 3편으로 마무리 짓도록 할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