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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1편) 일본은 메이지 유신을 어떻게 성공하였나?

(펌) 일본은 메이지 유신을 어떻게 성공하였나?

출처 : http://www.ygosu.com/community/yeobgi/1351116




고등학교 국사 근현대사 수업을 들을때면 항상 빡치지 않앗냐?


국사 선생님도 수업도중에 일본 개xx 씹xx하며 열을올리며 수업하는 부분이 바로


근현대사.


 


 


 



공부 오지게도 안하는 양아치 학생들도


누구나 한번쯤 봤을 법한 국사책에 메이지 천황의 사진과 함께 쓰인 문구.


"일본은 메이지 유신을 통하여 근대화에 성공하였다."


 


 


 


우리 조선은??


일본은 메이지 유신을 통하여 한번에 근대화에 성공했는데 우리는 뭘했나??


하고 분하면서도 답답하고 근대화에 일찍 성공한 일본이 약오르기도 했어.


 


 


 

비서구권 국가중 근대화에 자체적으로 성공한 나라는 일본이 유일할거야.


대국이라 자처하던 중국도 실패했고, 조선은 말할것도 없고.....


 

그래서 일본은 어떻게 메이지 유신을 성공했는지에 대해 써보고자 해.


1편과 2편으로 나눠서 쓸게.


자작이야 추입박아줘.ㅎㅎ


 


 


 


 




1편. 학문의 발전


 

메이지 유신은 1867년 19세기 아니야? 근데 왠 16세기 도요토미??


사실 메이지 유신의 시작을 어디서 부터 봐야할지 난감했어.


국사 교과서의 문장처럼 메이지 유신을 절대 하루아침에 뚝딱 만들어진 결과물이 아니기 때문에..


 


 


 

임진왜란에서 우리 조선을 지긋지긋하게 괴롭힌 바로 이 조총.


조총은 포르투갈로 부터 전해져 왔다고 알려져 있지.


서양과의 교역으로 조총만 들여왔으면 좋았을 텐데... 


도요토미의 골머리를 썩힌것이 하나 더 있었으니


 


 

바로 이 예수회... 크리스트교가 조총과 함께 일본에 들어와 버린것이였지.


도요토미도 처음엔 크리스트 신자들을 포용하고 인정해 줬었는데


영주들이 크리스트 신자들을 등에 엎고 세력이 커지자 불안해 했어.


 


 


결국 도요토미는 "바테렌 추방령"이라는 선교사들을 추방하는 명령을 내리고


선교사와 크리스찬을 믿는 사무라이들을 탄압해.


 




 




도요토미가 죽고 정권을 쥐게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아예 크리스트교 금지령을 내려버려.


그리고 한술 더떠서 외국의 배가 입항하지 못하게 쇄국령을 내려.


그동안 선교활동 겸 무역을 하던 서양의 교역이 거의 끊어질 상황이였어. 


 


 




네덜란드는 일본과의 상업, 정치적 교류에만 관심이 있던 터라


서양의 다른나라들과 달리 선교활동을 일체 하지않고 순수하게 무역만 하겠다고 해서 


도쿠가와 막부의 교역 허가를 얻어.


 


 


 


 



당시 17C 초 네덜란드의 교역망이야. 


최초의 주식회사인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동아시아 지역에 교역망을 넓히고자 했어.


 




 

우측 상단에 네덜란드 깃발꽂힌 작은 섬 보이지?


저곳은 나가사키의 '데지마'라는 곳인데, 일본이 쇄국령을 내린 후에 


1641년 부터 오로지 네덜란드만 저곳에서 교역을 할 수 있도록 만든 인공섬이야.




 


 



네덜란드로 부터 베드민턴과 당구 같은 스포츠가 들어오고


나가사키 데지마를 통해 일본에 서양문물이 전파되기 시작해.


 


 


1582년 교황의 초청으로 일본최초로 세계여행을 다녀온 덴쇼소년 사절단이 가져온


오르텔리우스의 세계지도야.


당시 동아시아 지역의 정보가 부족하여 일본과 한국이 표시가 되어 있지 않은데,


이것을 본 일본막부는 큰 충격을 받아.


 


 


 


 

세상의 중심은 중국이고 조선과 일본은 중국의 변방인줄 알았던 세계관이


한순간에 무너지는 계기가 되었어. 그리고 덩달아 세계속의 일본의 입지를 보고 위기의식을 느끼지.


 


 


 

1602년 이탈리아 신부와 명나라 학자가 같이 제작한 만국곤여전도야


이때는 일본과 조선이 표기가 되어있어.


1645년 청나라 볼모로 갔던 소현세자가 조선에 가져와서 큰 충격을 주고


17, 18세기 조선후기 실학자들의 세계관의 바탕이 되지만, 그냥 그뿐이였어.


 


 

 


 





데지마를 통해 난학(蘭學) 이라는 네덜란드 학문이 일본에 들어오게 돼.


각종 서양의 학문이 담겨있는 난학을 통해 일본은 두번째 충격을 받게되지.


 


 




제대로된 번역기나 인터넷이 없던시절.


난학에 심취한 일본학자들은 그냥 네덜란드어도 어려울텐데


의학용어를 맨땅에 해딩하며 연구해 다시 일본어로 재 편찬.


 


 


 

최초의 일본어 완역 서양서 "해체신서" 해부학 책이야.


과학, 수학, 의학, 천문학, 기술, 문화 모든 분야에서 난학의 연구는 정점에 달하고 있었어.


 


 


 


 


다행히도 막부들이 꽉막힌 놈들은 아니였는지


난학에 관심있던 막부들의 지원도 있었기 때문에 난학이 발전할 수 있었어.


나는 메이지유신의 밑바탕으로 가장 필수적이 였다고 생각하는것이 바로 난학이야.


 


 


 



17세기 에도시대 초기 부터 말기까지 수백년을 난학을 통해


서양의 기술들을 배우고 지식인들이 기초를 다져 놓았기에


메이지 유신이 성공할 수 있었다고 생각해.


 


 


 


 


증기 기관차의 설계도야.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인다고 해도, 기초적인 지식이 없으면 무슨 소용이겠어.


그냥 종이 쪼가리에 불과할뿐.


 


 


 


 

대동여지도가 만들어진 1860년대


 


 


 


세상은 이렇게나 엄청난 발전을 하고 있었는데...


안타깝게도 조선은 정말 우물안 개구리였어 ㅠㅠ


 


 


 


 


조선의 발전이 늦은 것이 다 유교 때문이라고? 맞는 말인데, 


그보다 조선은 유교를 받아들이고 대하는 태도가 더 문제였다고 생각해.


 


 


 


 


조선 유교의 근간이 되는 주자학.


유교는 원래 공자가 만든건 다 알고있지?


주자학은 주희라는 남송의 유학자가


성리학을 집대성해서 만든 학문이 주자학이야. 


흔히 알고있는 '이기론'을 만든 사람이야.


 


 


 


 

조선의 학자들은 주자학을 마치 성경처럼 믿고 어떠한 불신도 없었어.


주자학의 오류나 모순이 있다한들 비판의 대상조차 될수가 없었고


이런 주자학자들이 조정을 장악하고 있었던 시기지.


물론 양명학자나 후기 실학자들은 주자학을 비판했지만, 


그들이 조정의 주류가 되지 못했으므로, 별 힘은 없었고...


 


 


 


 

유복을 입고있는 일본인.


놀랍게도 비슷한 시기 일본도 주자학이 성행했다는 사실.


일본 주자학자의 시초 '후지와라 세이카'는 본래 승려였지만 임진왜란때 만난 강항, 김성일 등과의 접촉으로


주자학을 알게되고,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도 주자학을 알려줬다고 해.


 


 


 


 

에도시대 이후 수백년간 큰 전쟁이 없던 평화로운 일본에서는


칼을 찬 사무라이들도 글을 읽기 시작하고, 많은 유학자들과 난학자들이 생겨나게 되지.


 


 


 


 


하지만 18세기 후기까지 일본에서 왕성하게 발전하던 주자학은


양명학파, 국학파, 서학파 등 여러 학파들로 부터 학문적 비판을 받으며 쇠퇴의 길을 걷게되.




 



하지만 주자학이 일본에 남긴 큰 영향은


바로 허수아비 천황을 대신하여 나라를 통치하는 막부들에 대해 의문이 생긴거야.


 


 


 


 


 


본디 유교라 함은, 신하와 왕이 충과 의로 나라를 잘 다스리는 법을 논하는 학문.


곧 왕도와 법도의 학문이잖아. 그래서 예를 중시하는거고.


근데 유학자 입장에서 보니 천황이 왕이고, 다이묘들이 신하인데


일본의 통치 구조는 정 반대란 말이지??


 


 


 



 

그래서 막부체제에 대해 의문과 반감을 가지는 세력들이 생겨나고


이것이 또 훗날 새로운 시대를 열어주는 하나의 작은 불꽃이 되지.


1편 끝.